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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년 전 조선 왕실 최대의 사건이 일어나다

세상사 이모저모 2019.10.13 17:58

조선 왕실 최대의 사건이 일어나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도 궁궐 밖 나들이인 행행(幸行)을 자주했다. 재위 24년간 총66회의 행행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했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연민과 어머니 혜경궁에 대한 효성의 실천이다. 특히, 1795년에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사도세자의 구갑(舊甲)까지 경축하면서 자신의 재위 20년을 정리하는 뜻 갚은 행사로 화성으로의 행차를 시작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앞으로 소개할 이미지는 지금으로부터 218년 전인 1795년 2월 9일부터 16일 8일간 군주였던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맞아 아버지(장헌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에서 진행된 행사를 그린 것
이를 그린 것은 김홍도, 김득신 등 도화서의 그림사.

 

을묘년 화성 행차가 돈화문을 출발하다.
1795년 윤2월9일, 정조와 그의 어머니 혜경궁은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화성으로 향한다. 이날부터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8일 동안 화려하면서도 의미있는 행차가 시작된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거행함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함과 동시에 왕조의 권위 회복과 애민 정신이 깃들어 있는 화성 행차를 시작한 것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창덕궁에서 출발하는모습.

 

정조,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다.
을묘년 화성 행차에는 정조의 친족인 왕족들과 정승, 판서 등 신하들이 다 동원되었고 궁녀와 호위군사들까지 대략 6천 여명에 가까운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재정능력, 그리고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과감하게 8일동안 왕궁을 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조의 왕권이 안정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6천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수행인원과 함께 행차함으로써 국왕의 위엄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다.

 

화성으로의 새로운 길이 열리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화성으로 가는 새 길을 닦고,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정조는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길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 길은 고개가 많아 어머니와 6,000명에 가까운 행차 인원이 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앗다. 그래서 노량진에서 시흥을 지나 군포, 의왕을 거쳐 화성으로 이어지는 시흥길을 새로 만들었다. 시흥길은 원행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경제 활성화로 인한 새로운 운송로의 필요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출처: 수원화성박물관>

새로 만들어 지는 시흥길 – 새로운 운송로로 경제 활성화. 오늘날 경부선 철도가 연결된 길과 거의 일치한다.

 

화성 행차의 최대 난제 한강 건너기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을 활용하였다. 기존에 세곡이나 어물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에게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여 비용의 낭비를 막은 것이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1795년 정조대왕은 헤경궁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행차를 단행하면서 최고의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고 그 완성을 보았다. 당시 건설된 배다리의 설계 과정은 『주교절목』과 『주교지남』을 통해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를 그린 8폭의 병풍 중 『주교도』로 남아 있다. 또한 배다리 제작은 한강을 무대로 활동하는 상업용 선박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의 효심 – 용주사와 부모은중경
‘부모은중경’은 용주사 건립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됐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 후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현륭원을 관리하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정조는 당대 고승인 보경당 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에 감명을 받고 백성들에게 효의 근본을 알리고자 한글과 한문 혼용으로 판본을 만들었다. 특히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이채롭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혜경궁, 33년만에 그리던 남편을 만나다.
화성에 도착한 첫날(윤2월11일) 새벽,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으로 향했다. 남편을 떠나 보낸지 33년 만에 무덤을 찾은 혜경궁은 그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설움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였다. 혜경궁은 1735년 6월 홍봉한과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1744년 1월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왕세자빈이 되었다. 혜경궁의 불행은 남편 사도세자가 1762년5월 아버지 영조의 명령에 의해 뒤주 속에서 8일간 굶주리다가 죽음을 맞으면서 시작되었다. 어린 세손은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그 자리를 계속 위협받았다. 그녀는 안전을 위해 아들을 할아버지 영조 곁으로 보낸 후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세자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당쟁으로 희생되는 사도세자 –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나경언은 사도세자가 남몰래 궁을 빠져나가 평양에 다녀오고, 시전 상인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 등 비행을 저지른다고 영조에게 고해 바친다.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매우 분노하여 사도세자에게 스스로 죽도록 명을 내리고, 그가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 한다.

조선시대 화첩 ‘중국역사회모본’의 서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1762년 윤5월9일에 쓴 마지막 친필로 밝혀졌다.



 

 

현대에 그려진 정조어진 상상화
선원보감이란 책에 실린 정조의 얼굴




 

2월   11일 . 첫   번째   행사가   열린   곳은   수원의   화성성묘전배도(향교에서 성묘 참배),

 

   장소를 이동하여 낙남헌이라는 곳에서 과거 시험 합격자 시상

 

 

2월 12일 . 새로 조성된 수원화성에서 ( 완공은 다음해인 1796년 ) 방어태세를 점검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모습

 

 

2월 13일. 이번 행사의 주요 행사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2월 14일. 낙남헌양로연도(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 정조는 수원 주변에 사는 어르신들을 모아 술과 음식, 다과, 피륙 등을 주며 안부도 묻고했다.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양반이나 서민 등 노인이면 참석할 수 있었다 참석한 노인은 관료가 15명이었고, 그 외가 384명이었다는 것 참고로 당시 수원의 인구는 3만 명이었다

 

같은 날 밤 불붙은 화살을 쏘는 행사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정조가 앉아 있던 자리가 보인다 중앙에서는 격렬하게 흩어지는 불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화가들의 노력이 느껴진다                          득중정어사도(득중정에서 새로운 화약무기 시연)

 

2월 15일. 수원에서의 나흘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정조 일행. 시흥환어행렬도(시흥행궁을 지나는 행렬),

 

 

2월 16일 마지막 날 배교에서 한강을 건너는 일행. 노량주교도섭도(창덕궁으로 가기 위해 노량진의 배다리로 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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