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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세상사 이모저모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나

by 나비현상 2014.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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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00년 동안 풀지 못한 숙제… 후세를 위해서도 풀어야 할 과제

8월의 폭염이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 「Weely경향」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는 이 뜨거운 8월에 100년 전 치욕의 현장으로 간다. 1910년 8월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박태균 교수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여전히 풀지 못한 의문이자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반드시 답을 제출해야 하는 문제다. <편집자 주>

1910년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 한일병합 후 고종의 거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0년에 덕수궁 석조전이 완공되었다.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곳으로 더 유명하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궁을 떠났던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정조가 아버지를 그리며 사도세자의 사당(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이 보이는 창경궁에 자주 머물렀다면, 고종은 자신의 부인이 살해당한, 그래서 신변 보호를 책임질 수 없는 경복궁보다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면서 덕수궁 주변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의 공사관이 자리잡게 되었고, 황제가 사무를 보고 외국인들을 만날 현대식 건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1900년 착공한 건물은 1910년이 되어 완공되었다.

중앙집권적 왕조 식민지화 거의 없어
완성된 석조전은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그리고 3층은 황제를 위한 침실과 욕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석조전은 황제의 집무실이 되지 못했다. 1910년 이후 고종도, 그의 아들 순종도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석조전은 일본의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퇴위한 뒤 이왕직이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직제 하에 있었던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그래서 황궁의 이름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칭하였다. 이제 더 이상 황궁이 아니었다. 그저 왕공직(王公職)의 직제 하에 있는 고종이 사는 곳이었다.

이왕직이라는 직제는 당시 조선을 통치했던 일본의 고민을 보여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대한제국 황실의 대우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과 같이 수백년을 넘게 독립된 중앙 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조선의 왕실에 대해 ‘우리 왕실’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식민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또한 세계사에서 조선과 같이 중앙집권적 정부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있었고,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지역이 식민지화가 된 사례는 거의 없다. 

인도나 베트남 등 일부 지역 역시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중앙집권적 정부가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황실을 그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조선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의 왕자(이은)와 일본 황실의 후손(이방자)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조선의 황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했다. 일본의 황실 규범에 따르면 황실의 자손은 같은 황족이나 특별히 허가된 화족과만 결혼이 가능했다. 만약 조선의 황실을 일본의 귀족(화족)으로 편입한다면, 이는 황실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황실 규범을 개정하여, 황실과 화족 사이에 조선의 황실을 왕직과 공직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위를 규정하고 황족과의 결혼을 허가하도록 했다. 마치 지금 일왕과 일반 일본인들 사이에 ‘욘사마’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왕공직의 문제는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일본식 화장을 할 것인가, 조선식으로 해야 하는가? 결국은 조선식과 일본식을 교묘하게 혼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왕실과 고종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에서부터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일본이 그만큼 식민지 조선을 대접하고 잘 해준 것인가? 일본의 이전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나 타이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와 같이 1930년대 초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에 새로운 황제를 앉혔지만, 이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 아니라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국의 이왕직과는 다른 것이었다. 식민지에 대학을 설립해 준 것도 일본이 거의 유일했고, 경성과 타이베이가 유일한 예외 지역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의 근대화, 자본주의화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평가 이전에 먼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논의했던 문제이면서, 또 너무나 쉽게 잊고 있는 문제이다. 왜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을까? 조선과 같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국가가 식민지가 되는 예가 거의 없었다면, 왜 조선만이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되었어야 했는가? 게다가 근대 이후의 세계사에서 이웃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던 예도 거의 없었다.

박태균 교수가 일본 가나가와현 우라가 소재 페리 기념관에서 페리 제독의 일본 상륙을 재현한 그림 앞에 서 있다.


우선 그 책임은 힘없이 몰락한 조선의 정부와 왕에게 돌아갔다. 물론 조선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왕과 왕실의 권위에 대한 예우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왕은 곧 나라였다. 1919년의 3·1운동,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이 모두 고종과 순종의 장례에 맞추어 일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1910년대 국권회복운동이 왕실을 다시 세우는 복벽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왕의 권위에 대한 예우를 한다고 해서 국권 상실과 관련된 왕의 책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고종은 항상 무기력하고, 줏대가 없는 왕으로 그려졌다. 한 때는 아버지 대원군의 품 안에 묻혀 있었고,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자 곧 민비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부인이 억울하게 일본의 깡패들에게 살해당한 이후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신하들이 중명전에서 왕과 국가의 모든 권한을 일본에게 넘길 때 무기력하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왕이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보내면서 마지막 노력을 했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의 아들은 500년이 넘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화의 책임을 조선의 왕실과 고종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제국주의 국가들이 협력해서 식민지를 만들려고 했던 세계질서로부터 더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으로부터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의 진압,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 러일전쟁, 을사늑약과 카츠라 태프트 조약, 그리고 통감부의 설치와 조선군의 해체 및 고종의 폐위, 결국 강제적인 한일병합. 이렇게 일본의 계획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과 함께 세계질서의 변방이었던 동북아 지역에 대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한 영국과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조가 조선 식민지화의 근본 원인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어 있었던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의 일환으로 최근 고종과 대한제국, 그리고 광무개혁에 대해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는 노력이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평가는 이와 다르다. 1960년대 힐러리로부터 시작하여 최근 듀스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일본은 조선이 청이나 러시아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 일본을 위협하는 것을 막도록 하기 위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러나 무기력한 조선 정부는 일본의 ‘선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근대화에 실패함으로써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서양의 평가이다. 이는 또한 일본 역사가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조선 내부의 개혁과 근대화 실패로 끝나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 식민지화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서양이나 일본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외부에만 책임을 돌린다면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숙명론에 빠지고 만다. 무슨 노력을 했더라도 제국주의의 강압적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니까. 그렇다면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스스로 근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한국 역사학계는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광무개혁과 같이 조선 내부에서 사회적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했던 움직임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북한에서는 갑신정변을 부르조아혁명으로, 김옥균을 혁명가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덕수궁 별채 중명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원인을 찾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조선 정부와 왕실,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 그리고 개항 이래로 계속된 다양한 개혁 움직임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10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오늘, 그 원인에 대해 어떠한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 더 진척되지 못하고 일반 대중과 연구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1853년 흑선(쿠로후네)에 의해 개국한 일본은 10여년이 넘게 내란을 겪다가 1867년에 가서야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서양에 비해 후발 국가였던 일본에 의해 1876년에 개항하였다. 그리고 8년이 지난 1884년 근대적인 개혁을 위한 갑신정변이 있었다. 비록 이 노력이 개혁가들의 근시안적 생각과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1894년과 1895년에는 갑오개혁이 있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광무개혁뿐만 아니라 독립협회의 마지막 노력이 있었다.

자발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실패한 조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의 다양한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서양으로부터 부국강병의 방법을 수입하여 일본에 도입하였다. 조선도 1880년대 이후 청과 일본에 지식인과 관료들을 파견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했다. 일본이 19세기 말까지 서양 제국과 불평등조약에 묶여 있었다면, 한국은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이 있었지만, 1882년 미국과의 조약 이후 서양 국가들과의 통상조약은 불평등조약이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 말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시차로 본다면 기껏해야 10~15년. 19세기가 지금처럼 짧은 시간 내에 조변석개하고 천지개벽하는 시기가 아니었다고 본다면, 10~15년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그다지 큰 차이를 갖고 있지 않았던 한국과 일본이 개국 이후 근대화 개혁을 시작한 지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 나라는 제국이 되고, 다른 한 나라는 식민지가 되었을까?

혹자는 이미 개국 이전에 일본이 상당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인구 100만의 도쿄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경제적으로는 일본보다 못했을지 모르지만,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일찍부터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중앙집권체제는 후발 국가들의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러나 조선은 자발적 근대화에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다. 물론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심국가로 자부하던 중국 역시 근대화에 실패하고 반(半)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조선과 청의 중앙집권체제에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18세기 청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를 치켜세우기에 바빴던 우리네 역사인식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추상적인 질문과 답에 안주할 수는 없다. 경술국치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구해야 한다. 



이 문제는 최근 관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우리가 풀어야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후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다. 100년 동안 풀지 못했다고 그냥 던져놓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100년이 지난 오늘의 국제질서 역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나서 석조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페리가 상륙했던 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웃에 위치한 한국과 일본이 왜 그다지도 다른 길을 걸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았다. 페리가 150년 후 에도에 갔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페리는 미국과 일본이 경제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고종과 조선정부의 각료들, 그리고 당대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식인들이 만약 100년 후 석조전 앞에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면, 빌딩 숲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빌딩 숲에 둘러싸인 덕수궁은 100년 전 조선왕실의 모습을 더 초라하게 보이도록 했다.

<글·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출처: 2010.08.17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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