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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황당 . 유머 및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by 나비현상 200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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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의 사인(死因) 의혹은 동성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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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yotr Ilyich Tchaikovsky : 1840.5.7~1893.11.6>


근대 러시아의 작곡가 이자 세계적인 위대한 음악가로 알려진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생애는 어떠했을까?

과연 전근대 대부분 작곡가들의 알려진 생애 처럼
화려하고 개성있는 시대를 풍미한 음악에 비해
초라하고 때론 기복있는 삶의 편린 속에서
동시대의 명성 보단 후세의 찬사를 기대하며
쓸쓸히 이슬이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님 익히 알려진 대로 단순히 수인성 질환에 의한
콜레라로 인한 병질인자로 죽어간 것일까?

물론 아직도 정확한 사인을 누구도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음악과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가 그이기에 비록 후세의 자료는 미약하나
여러가지 사인(死因)설 들이 끈임없이 증폭되어 전해지는 것만은
부인 할 수 없을것 같다.

실제로 그 자신이 생애 최고의 역작이라 칭한
그리고 후대의 평가로도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이라 칭할 수 있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교향곡 비창
Symphony 6 "Pathetique"의 초연이후
날아든 당대의 차가운 반응때문에
중압감과 자괴감으로 인해 자살 했다는 설 역시 의혹설의 한가지로 남아있다.


                                                  글 구성 : 風林火山

그러나 이것도 근 한 세기를 통틀어 전해진 콜레라 사인설을 부인하는
또 다른 죽음에 대한 의혹설의 한 가지일 뿐일지도 모른다.

실례로 독일의 클라우스만 이란 소설가는 이 사인설을 주제로
비창 교향곡이란 소설까지 출판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후세의 음악 애호가 뿐만아니라
가십꾼들에게도 끊임없이 회자 되는 이유가 바로
위대한 음악가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죽음에 대한
의혹설 때문이라 생각한다.

Argerich plays Tchaikovsky Piano Concerto Part 1.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태생으로 이 지방의 수석광산 검열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부터 음악학교에서 재원으로서 작곡가의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 Tchaikovsky as bureaucrat. >

그러나 첫 입학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帝立) 법률학교를 졸업후
1859년 법무성의 서기관으로 일하다 운명적으로 당대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안톤 루빈시타인이 설립한 러시아 음악협회의
음악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나중에 이 곳이 러시아 최초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하게 된후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가의 전문적인 행로를 밟게 되고
1864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개설후 초대 교수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Horowitz: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



사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아주 어린 시절 부터
혹독한 훈련과 그에 뒷받침 되는 음악 영재 교육에 바탕을 둔
커리큘럼에 의한 트레이닝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트킨스크 수석 검열관이였던 아버지의 후처 출신인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에브나의 평소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치던
음악적 소양과 그 기질을 충분히 물려 받은 것으로 사료 된다.
또한 법무성 서기관일을 하던중 입학한 본격 음악원에서의 열정과
니콜라이 자렌바등에게 배운 체계적 이론 수업이 그후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자리매김하는데 있어서 튼튼한 기반이 되어 주었다.

어쩌면 앞서 말한 사인들을 얘기 하기에 앞서
비교적 근세에 제기된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를  둘러싼
타인에 의한 강압적 명예 살인이라는 의혹 역시
이런 음악적 소양을 풍부하게 타고나게 한 자상한 모친에 대한 그만의
지나친 마더 콤플레스에 의한 원인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 Tchaikovsky with wife Antonina Miliukova >

실제 그는 이런 한 없는 모친의 사랑을 뒤로 한채
그의 나이 14세때 콜레라로 불현듯 숨을 거둔 모친에 대한 기억에서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정신적 충격과 갈등을 겪었던것 같다.
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사제 지간으로 만나 그의 동성애적 기질을 숨기고자
위장 결혼했다고 알려진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류코바란 여성과의
불행한 결혼사
역시 그의 이런 불안한 심리적 성장 환경에서 나온
여성과의 사랑에 대한 히스테리적 심인성이 원인 되지 않았나 하는 분석이다
.
아뭏든 이후 그는 여성과의 정상적 사랑에 대한 어떤 억압과
갈등을 앓은 듯이 보인다.
그는 이 불행한 결혼사에서 모스크바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 한 적도 있었다.

그후 그의 인생 및 음악사에 있어서 또 한 명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바로 14년간 오로지 그와 서신만을 주고 받으면서
정신적인 사랑과 때로는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차이코프스키의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창작기간에 희망을 샘솟게 한 장본인인
나테즈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 Nadezhda von Meck >

그녀
는 러시아 철도 재벌의 상속 미망인으로서 이미 12명의 자녀를 둔
유복한 여인이였지만 평소 음악과 문화에 대한 열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열렬한 후원자이였기에
차이코프스키는 이 기간 동안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제정적 지원자겸 정신적인 후원자 였던 셈이였다.

흥미로운 점은  14년의 기간동안 무려 1천통이 넘는 서신을 통해
음악에 대한 열정과 공감을 나누었지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도
단순히 목례정도로만 헤어졌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후에 그녀의 중증의 신경병이 알려 졌지만 차이코프스키에게
일방적 후원과 서신 중단을 통보한 이후
차이코프스키 역시 심한 신경질적 증상과 평생을 함께 해온
조울적 병세 역시 악화 되었다고 한다.
평소 그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헌정하던 그였지만
일방적인 서신 중단과 이별 통보해 그녀에 대한 절망과 험담역시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in b-flat minor, Op.23 -
I. Allegro non troppo.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역시 그녀가 앎던 중한 신경병에 대한 예후가 아닌가
싶다 차이코프스키가 숨을 거둔후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쓸쓸히
숨을 거두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랑이
육체적 사랑의 쾌락과 번뇌를 벗어난 이런 정신적인 사랑이
아닐가 싶기도 하다
물론 요즘의 젊은 세태들이 이해 하기 힘든
육체적 사랑의 약속과 확인 어렵고
또 사랑에 무엇보다 아픈 이런 아련한 상처가 남겼지만... ...

어쨌든 이 황금기적 시기에 그는 다수의 걸작들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이미 어느정도 서유럽에서 그의 명망이 알려진
이후라서
폰 메크 부인의 서신과 재정 연금 중단이후라도
작곡에 매진 할 수 있었다.

걸작 발레곡 백조의 호수(Swan Lake),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 suites),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The Qeen Of Spades),
그리고 Symphony 6 ."Pathetique" 비창 교향곡을 제외한,
프쉬킨에 대한 문학적 사고가 훌륭히 전철된 Manfred Symphony
포함한 6곡의 심포니, 바이얼린 협주곡들과
우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Piano Concerto No.1)등이 이 시기에
탄생한 걸작들이다.


<Original cast of Tchaikovsky's ballet, The Sleeping Beauty, St Petersburg, 1890>

그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곡으로 알려진
호두가기 인형( Nutcracker Suite)와 오페라 이오란테(Iolathe)
1892년에 각각 초연되었다.
- 물론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그랬듯 항상 이 섬세한 면도날 같은
심성의 예술가들의 작품은 현세의 비평가들 보단 후세의
평가 가치에서 비로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 역시 이 초연공연의 냉담한 혹평에 못 견뎌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당시의 음악적 평가는 그의 조국 러시아보다는 유럽과 미국등지에서
괄목한 만한 작곡가로 이미 그를 인정할 정도 였다. -

Tchaikovsky - Nutcracker, "Sugar Plum Fairy Dance"



그리고 평생 그를 따라다닌 동성애란 당시로선 심한 불명예스런
이력의 한 대상이로 알려진 장본인인 조카 보브 다비도프(Bob Davidov)에게
쓴 편지와 역시 지인 이였던 출판업자 유르겐슨에게도 쓴 편지에서도
밝혔듯 자신의 생애 최대 걸작이라 칭했던 흥분한듯한 감정적
글들마저 후세에도 전해지는 교향곡 비창(Symphony 6 ."Pathetique")이
그의 죽음을 며칠 앞둔 1893년 10월 28일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물론 이 역시 현세의 질시와 냉담함이 때로는
천재적 예술가들의 창작열에 더욱 불을 당기듯 당시로서는
전반적인 비평만이 난무 할 뿐이였다.
그러나 후세의 평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에겐 3대 발레곡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그이지만
대부분의 평론가가 손꼽는 차이코프스키 걸작이 바로 비창 교향곡이고
본인 역시 그런 그의 심미안적 심성과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일찍 여읜 모친에 대한 죽음과 동성애적 기질에 대한 갈등과
그 자신이 어쩌면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잃어버린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한 동경을 솔직하게
그린 이 쓸쓸한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그가 살던 동시대의 평가 보다는
앞서 말했듯 많은 천재적인 작곡가들의 경우 처럼
후대의 진정한 평가로서 항상 재조명되고
그의 의혹에찬 죽음조차 다시 거론되는 음악가이다.

당시 러시아의 음악계는 기존의 국민악파로 불리던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발라키에프,큐이등
5인의 국민주의파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음악적 세력과 어린 차이코프스키에게 처음으로 전문적 음악이론을
정규적으로 접하도록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설립하게 만든
장본인인 뛰어난 피아니스트 출신의 안톤 루빈시타인과 그 형제가
주축이된 서구음악파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웨스터 나이저(Westernizer)로 불리면서 기존의 러시아 음악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르네상스를 지난 서유럽의 우수한 음악적 테크닉과
이론들을 지지하는 편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코프스키의 또 다른 다양한 음악적 구심정을
발견 할 수 있다.
바로 국민주의 음악파인 무소그르스키,발라키에프등과 어울리면서
음악적 교감을 나누었고 한편으론 모스크바 음악학교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등과 같이 교수직을 겸하면서
서구적 음악이론을 가르치면서 이 역시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은 생전에 스스로 어떤 경향이나 음악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떻든 이런 전통적인 러시아의 감수성과
Westernizer에 속한 그의 뛰어난 음악적 테크닉들은
당시의 시대 조류를 넘어 그리고 현재의 재평가를 넘어
고착돤 평론 자체를 무의미 하게 만드는 오직
그 다운 사랑스런 음악에 대한 그 자신만의 개성이자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
아니, 그의 고결하고 섬세한 음악이 지구상에서 언제나 흐르는 동안은
앞으로도 계속될듯 보인다.


< Tchaikovsky (left) with his nephew, Vladimir "Bob" Davidov >

하지만 당시의 그의 죽음에 얽힌 몇 가지 의혹들
즉 곳곳의 그가 지인들이나 출판업자 그리고 그의 동성애의 상대였다고
전해진 조카Vladimir "Bob" Davidov 에게 남겨진 서신등을 통해서
발견되는 은유적 표현이나 정황역시 동성애에 대한 심한 죄악을
명예를 불사르는 작곡가의 양심과 저울질 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헤아린다면
그가 의도적 살인에 의한 자살의 희생양 이란 점들이 부각되고 있다.

교향곡 제6번 '비창' Op.74 1악장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비창(Symphony 6 ."Pathetique")
초연이후 정확히 9일째 되는날 그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 한다.
사인은 익히 알려진 대로 콜레라로 인한 죽음 ... ...
그러나 근 한세기간 그리 알려진 이 사인이외에 지난 1978년 차이코프스키의
전기작가였던 David Brown에 의하면
그는 동성애적 불명예 사실이 알려져서
이를 추궁하던 귀족이 고위층과 짜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대신
비밀리에 행해진 귀족들의 명예법정에서 강요된 자살을 언도 받았다는 것이다.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적 사실이 탄로나길 두려워한 러시아 제정귀족들이나
작곡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때 간과 할 수 만은 없는
자살설의 이유같기도 하다.


   <autograph score of the ballet Swan Lake, by Pyotr Ilyich Tchaikovsky, 1876.>


그런가하면 당시 수인성 질환인 콜레라로 인한 사인이
그가 비밀 명예재판에서 언도 받은 후 마신 독배의 내용물인
비소의 중독증상과 비슷하다는 것과,
실제 당시 러시아의 콜레라 감염자에 대한 사후 처리의 법규에 따르면
까다롭게 러시아 당국의 감독하에 시신 처리가 이루어 지는 것이 관례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유해는 에외적으로 수백명 조문객의 방문과
러시아의 전통대로 손과 이마에 입을 마추면서 이별의 의식을
나누었지만 아무도 감염된 이가 없었다는 기록이다.
이 점 아무리 당대의 알려진 작곡가라 하지만
전염성 질환으로 치부되던 콜레라를 무엇 보다 두려워 하던
당시의 제정 러시아의 실상으로선 납득 하기 어려운 점이다.

Tchaikovsky - 1812 overture (Part 1)


또한 비소라 추정되는 독배를 마신 이후 주변인들에게
독이 퍼지는 시간동안 오늘이 마지막이고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반대로 생각하면 그 증상 역시 설사와 복통등
콜레라로 추정 되기에 의심이 없는 증상으로 비추어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뭏든 유명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그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이후 동서고금을 통틀어 빠지지 않는
의문과 음모론을 불러 일으 키는 단골 소재인것 같다.
그 만큼 그들이 평범 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술적 즐거움과
공감을 통해 우리네 인생의 또 다른 범인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미지의 세계를 간접적이나마 남겨주고 간 이유가 아닐 듯 싶다.

앞서 말한 생애의 역작 비창 교향곡의 당시로서는 냉담한 반응역시
그가 굳이 동성애적 불명예로 인한 비밀 재판의 희생양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이유였다는 발간된 한 편의 소설책처럼
어쨌든 이 역시 여러가지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설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 Tchaikovsky's grave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대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섬세하면서 웅장하고 전통적인 러시아의 기풍과
서구적이고 화려한 테크닉이 조화된 이 명곡들야 말로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진 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온 인류에게 시대를 뛰어넘어
깊은 영혼의 안식을 주는 공감으로......!


글 구성 : 風林火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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