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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세상사 이모저모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던 천재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by 나비현상 2009.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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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출생 : 1856년 7월 9일 (크로아티아) ~ 1943년 1월 7일
학력 : 프라하대학교
경력 : 1891년 테슬라 변압기 제작, 1888년 회전자기장법칙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구 리카시 스밀리얀이란 작은 마을 목사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그라츠공과대학과 프라하대학에서 수학·물리학·기계학 등을 공부하였다. 비상한 암기력과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과학문명을 1백년 앞당긴 천재과학자, 우주에서 길을 잃어 지구에 잘못 태어난 외계인. 미국의 전설적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일컫는 말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태생인 테슬라는 28세 때인 1884년 미국으로 이주해 수많은 중요한 발명과 선구적 업적을 이뤄냈다. 교류전압 송신, 다상교류 시스템, 무선통신, 고압전원을 만드는 케슬라 코일, 형광등, 라디오 등의 발명자로 그는 기록되고 있다.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네는 기본 단위 T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것이다. 그는 에디슨에 필적할 혁혁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생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생애을 살았다.

영국 BBC방송의 인터넷 온라인 이용자들은 지난 1천년간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에디슨, 구텐베르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어 테슬라를 4위로 꼽았다. 테슬라의 꿈은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다른 행성에 존재한다고 믿는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에 사람들로부터 몽상가, 미치광이란 오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연구했던 무선에너지 전송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입자빔 무기, 공간 자체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뽑아쓰는 실험 등은 현재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뒤를 이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테슬라의 연구자료 중 상당 부분은 그의 사후 미국의 국방 정보기관에서 입수해 현재까지도 비밀문서로 분류돼 있다.

그의 연구 중에 현대 과학자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작은 공 모양의 전기덩어리(구형 번개라고도 불린다)를 마음대로 만들고 다루는 시범을 여러차례 보였다.이 현상은 핵융합 플라즈마 연구의 혁신적인 돌파구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과학자들은 못하고 있다. 1915년 11월 6일자 뉴욕타임스는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정작 수상의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이 막판에 수상자를 바꾼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무선 에너지 전송 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그리고 죽음의 광선

딱 딱하고 고정된 필라멘트를 쓰지 않는 네온등은 길이와 모양에 관계없이 제작할 수 있다. 무한 동력 장치, 번개 충전용 코일, 무선 전기전송, 지진 발생기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연구를 하여 그의 이름이 붙은 여러 가지 장치를 만 들기도 하였다.

노 년에는 전자기파 등을 이용하여 지진을 일으키는 지진병기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미국 국방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전한다. 당시에 그의 많은 연구가 일반에 공개 되었다면 원자력에너지 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거나, 원자탄 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테슬라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주 에너지(자기장, 전기)를 동력화 해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속력이 시속 90마일(약 144 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미 1900년대 초에 연료가 전혀 필요없는 자동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렇게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낸 발명들의 대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려야 했다. 인류에게 신기술을 공개할 수 없었던 테슬라. 그는 당시의 인류의 인식 수준 으로는 그의 연구가 당초 의도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살상에 사용되거나, 소수 사람들의 치부에 사용되어지는 것을 우려했었다.

그러나 그전에 라디오를 발명하는 등 이미 그가 이뤄 놓은 연구와 업적들은 이후 모국 유고슬라비아의 화폐에 자신의 초상이 실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줄곧 독신이었고 혼자 일했으며 자신의 연구가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소설가 마크 트웨인ㆍ저널리스트 존 오닐 등과 사귀며,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시를 쓰는 등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라츠(Gratz)에 위치한 폴리테크닉 공대(Polytechnic Institute)에서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을 공부하며 4년을 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적 탐험을 계속하던 그는 1943년에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여든일곱해의 생을 마감했다. .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다른행성의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천재적인 과학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로서 소신을 지키는 과학자였다.

 


  니콜라 테슬라, 나폴레옹 사로니 (Napoleon Sarony) 촬영

 

니콜라 테슬러는 라디오, 리모컨, 형광등, 발전기, 전자레인지등 800여개의 발명특허권을 보유.


 

"에디슨과 함께라는 노벨상 싫어"

여기에 소개할 니콜라 테슬라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상을 받기위해 로비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노벨상의 수상 거부의 의견도 웃긴다. "단지 에디슨과 나란히 수상할 수 없기 때문이오" 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당대나 지금이나 발명의 왕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인데 에디슨과 같이 받는 것이 싫어서 노벨상을 거부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많은 의문이 있다. 우리는 에디슨을 발명의 큰 인물로 알고 있고 테슬라는 거의 잘 모르기에 에디슨과 같이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지 않은가? 하는 그런 의문이다.

이후 이야기 전개에서 알려지겠지만 테슬라는 에디슨과 비교해도 결코 비중이 딸리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에디슨보다 우리의 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혹자는 그를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 최고의 지성이라고까지 격찬한다.

테슬라의 업적은 미국 국방의 이유로 감추어지고, 적대적인 동구의 이민자란 이유로 무시되어져 왔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발명과 결혼한 사람, 무한에너지를 꿈꾸는 황당한 몽상가로, 자신의 발명이 세계대전에 쓰이는 것이 마음 아파 괴로워하는 휴머니스트로, 발명의 대중화를 위해 특허를 포기하는 멋진 사람으로, 그러나 말년은 돈에 의해 찌들린 삶으로 살아간 사람.

 

전류싸움서 테슬라의 '교류'가 승리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 )는 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구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통치아래 있었으므로 미국인들은 그를 러시아 출신으로 말하곤 한다. 세르비아는 얼마 전 크로아티아와의 내전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전에는 유고 연방으로 우리에게 알려 졌다. 테슬라는 러시아인도 세르비아인도 크로아티아인도 미국인도 되는 셈이다.

테슬라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구 리카시 스밀리얀이란 작은 마을 목사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그라츠공과대학과 프라하대학에서 수학·물리학·기계학 등을 공부하였다. 비상한 암기력과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테슬라가 에디슨의 논문을 읽기위해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와 파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였으며 188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에디슨과 함께 일하기도 하였으나 연구방법이 서로 달라 헤어졌다. 연구방법의 차이는 자명했다.

에디슨은 반복된 실험을 하면서 발명을 했고 테슬라는 발명하기 전에 발명의 기반기술과 관계성을 판단한 후에 발명을 했다. 에디슨은 직류를 고집했고 테슬라는 직류의 한계를 알고 교류를 주장했다. 그래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교류시스템의 특허를 웨스팅 하우스라는 회사에 팔아버린다. 어느 누구의 발명 방법이 옳았다는 것은 없다. 에디슨은 발명의 왕이란 칭송을 듣지만 테슬라는 자장밀도의 단위로 그것도 전문가들이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에디슨과 테슬라는 한쪽은 직류로 다른 안쪽은 교류의 발명가라는 대립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을 바보로 만들었다. 교류와 직류의 전쟁에서의 최후의 승자는 테슬라의 교류가 된다. 이미 에디슨은 직류에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고, 교류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 역시 실패하였다.

심지어 에디슨은 사형수를 교류 전류로 죽이고자 몇 번을 시도하지만 그것 마저도 실패한다. 에디슨의 직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전선의 두께가 매우 두꺼워야하고 거리에 따라 손실이 커져 수km를 가면 전기 공급소를 두어야 했다. 여기서 테슬라는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교류를 자신의 몸에 통과 시켜 전구를 켜게하여 위험성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교류방식이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채택됐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시스템은 테슬라의 것이다. 현재 우린 전기 없이 살수 없다.


 

전세계에 전력 무상 공급 꿈꿔

공간에너지와 무한동력장치를 생각해낸 테스라는 무선으로 전 세계에 전력을 공짜로 송신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00년에 금융가인 모건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롱아일랜드에 무선 방송탑을 착공하였는데, 이 방송탑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화와 전신서비스, 사진, 증권정보, 기상정보 등을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원자 모건은 공간에너지를 전 세계에 무상으로 공급하려는 테슬라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재정지원을 중단하였다. 태초 이래 이렇게 원대한 구상을 한 발명가는 없었다. 그리고, 에디슨을 가볍게 비웃을 발명가는 테슬라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대중화를 위해 특허를 포기한 테슬라에게, 전 세계에 무상으로 전기를 보내겠다는 테슬라에게, 전 세계에 무상 인터넷을 구상한 테슬라가 보기에, 에디슨은 탐욕적인 발명가, 전기의자나 만드는 비인간적인 발명가에 불과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테슬라의 꿈은 한마디로 유토피아였다.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의 통신이 가능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며,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생명체와 연락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테슬라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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