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금/세상사 이모저모

신조어

by 나비현상 2007. 10. 26.
SMALL

일찍이 노자는 도가(道家) 사상에 입각해 바람직한 군주의 순위를 매겼다. 으뜸은 ‘백성들의 삶에 직접 간여하지 않아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임금(帝力何有於我哉)’이었다. 다음은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 3위는 권력을 휘두르고 형벌로 다스리는 패권정치의 지도자였다. 이보다 못한 ‘꼴찌 임금’은 백성들에 의해 멸시 혹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었다.

요즘 일본에선 입시철을 앞두고 수험생 사이에 번지고 있는 신조어가 있다. “아타시, 모 아베시차오카나(나, 이제 ‘아베’ 해버릴까)”.

지난달 돌연 사임을 발표한 아베 총리의 돌출행동을 빗대 시험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지도자가 신조어를 통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수험생뿐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 급속하게 퍼진 신조어가 또 하나 있다. ‘KY’.

‘구키’(공기)의 머리글자인 ‘K’와 ‘요메나이’(읽지 못한다)의 머리글자 ‘Y’를 결합한 말이다. ‘현실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이 신조어의 주인공 또한 아베 전 총리였다. ‘KY’는 처음에는 10~20대 젊은이들이 인터넷 댓글에 주로 사용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나이 지긋한 국회의원들도 공공연히 ‘KY총리’란 신조어를 쓰게 됐다.

최근 한국의 국립국어원이 신조어 사전에 ‘놈현스럽다’는 단어를 넣어 발간하자 청와대가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이라며 발끈했다. 뜻은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다’란다. 책이 회수되진 않았지만 청와대의 항의 때문인지 추가 배포는 중단됐다. 신조어의 대상이 된 당사자는 억울할지 모르나 많은 국민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걸로 신조어가 성립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조롱의 대상이 되는 군자가 ‘꼴찌 지도자’라고 말한 노자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이란 ‘백성을 신뢰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가장 명심해야 할 덕목으로는 ‘귀언(貴言)’을 꼽았다. 제대로 된 지도자는 쓸데없이 간섭하지 않고 말을 아낀다는 것이다.

우리 지도자가 몇 등 지도자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청와대가 신조어 사전에까지 간섭하고, 대통령이 “지지도가 많이 올라 당분간 또 까먹을 수 있는 밑천이 생겼다” “헌법상 북쪽 땅도 우리 영토인데 그 안에 줄(서해 북방한계선)을 그어 놓고 ‘영토선’이라고 주장하면 헷갈린다”며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노자의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 보인다.

김현기 도쿄특파원

LIST

댓글